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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설거지론으로 살펴보는 현대 대한민국의 젠더갈등

by Frost. C 2022. 10. 5.

 

얼마전 유튜브를 보다가 밑에 달린 댓글을 보고 이게 무슨 뜻인가 싶어 알아보고 적잖이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아래는 그 댓글의 캡쳐본에서 화자의 이름을 모자이크 처리한 내용이다.

남의 결혼생활을 두고 퐁퐁남이라고 매도했던 댓글은 현재는 여론이 좋지 않았던 탓인지 비판받고 삭제된 상태

 

퐁퐁이라는 단어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찾아보고 정리한 바로는 다음과 같다.

설거지론에서 소위 '설거지당한' 배우자, 또는 외벌이면서도 배우자를 상전으로 모시며 적은 용돈을 타 쓰고 가사노동까지 하는 사람을 의미

 

설거지론이라는 신조어가 나왔으니 이 의미도 찾아보았다. 의미는 더욱 충격적였다.

연애 경험이 전무하거나 매우 적은 남성이 젊은 시절 문란한 성생활을 즐겼던 여성과 결혼하는 행위를, 타인이 식사를 마치고 남은 더러운 식기를 자발적으로 설거지하는 것에 비유하여 비합리적인 선택임을 주창하는 인터넷상의 담론
- by 나무위키

 

'아.. 젠더 갈등이 이 정도 수준으로까지 번졌나?' 싶었고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것일까?' 하는 생각도 해 봤다. 몇 가지 사항을 통해 원인을 추측해봤다.

1. 입시, 취업, 결혼, 내 집 마련으로 이어지는 끊임없는 인생고와 경쟁, 계층 양극화의 심화
2. 한국인 특유의 불확정성 회피 심리에 따른 모든 가치의 정량화 추구
3. 도덕관념과 현실의 괴리를 해소해줄 시대정신의 부재와 그 자리를 꿰찬 배금주의
4. 빈곤해지는 소통의 장과 개인의 소통 능력 및 의지

본론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먼저 밝혀두고 싶은 부분이 있다.

1. 본인은 설거지론의 주장과 근거에 반대한다.
2. 그렇다고 설거지론에 반대하는 여성의 래디컬 페미니즘적 의견에도 동조할 수 없다.


본격적으로 의견을 피력하기에 앞서 목차를 잡고 시작하겠다.


[설거지론이 대두되는 배경 : 인생고와 경쟁, 계층 양극화의 심화]

시대가 발전해가면서 젊은 세대들의 경쟁은 심화되어간다. 죽도록 노력을 하는데 그에 따른 성과가 보장되지 않는 듯한 분위기 속에서 고통은 심화되어가고 계층간 양극화가 심화되어간다. 인생이 팍팍해져가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탈출구나 해결 방안을 찾는다.

좋은 사람과 함께 함으로써 위기를 타개해나가고 싶은 심리가 그것이다. 이거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개인이 가정을 이루고 사회의 기초조직을 구성하는 건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마땅히 권장해야할 일이기 때문이다. 허나 문제는, 상대가 자신이 기대한 좋은 사람인 만큼 자신도 과연 좋은 사람이냐는 것이다. 스펙상의 문제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인성의 측면을 말하는 것이다. 결혼 생활은 양 당사자 모두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희생을 요구한다. 허나 이를 감내할 생각이 없이 상대방의 일방적인 희생을 기대하는 것이었다면 그 가정은 지속가능할 수 없다.

 

[설거지론이 대두되는 배경 : 한국인 특유의 불확정성 회피 심리]

허태균 교수의 '한국인의 심리를 파헤치다' 강의 주제 / 어쩌다 어른 방송분 캡쳐

 

확인하는 것이 까다로운 비물질적 가치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허나 우리는 단기간에 성과를 이뤄내는 것을 강요받아왔고 이에 익숙해졌다. 무언가의 정성적 가치를 판단하기 위해 심사숙고하거나 기다려줄 시간이 없으니 자연스레 정량적 측면에서 수치화를 하는 것에만 주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우리의 의식 속에 뿌리 깊게 자리잡혀있다.

명문대 나왔으니 성격도 좋겠지.
집안도 좋고 본인도 잘 버니 인격적으로 완벽하겠지.

 

와 같은 예단 말이다. 사실 저 둘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런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성격이라든가와 같은 정성적 기준은 쉽사리 배제되고 재산과 학벌, 직업과 같은 가시적인 부분만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기조가 만연하게 되었다. 실패하지 않는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근거만큼 확실한 게 없기 때문이다.

 

[설거지론이 대두되는 배경 : 시대정신의 부재와 배금주의]

지금이나 현대나 대한민국 국민의 의식에는 유교가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허나 서구 열강과 일제에 침탈당한 수모로 유교의 이념적 가치는 사실상 땅에 떨어지기 시작했고 사회를 운영하기 위해 수입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자본주의 등이 급속하고도 자연스럽게 시스템으로 자리잡았다. 기존의 가치를 송두리째 부정당하고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가치로 지배되는 세상에 적응해야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다른 나라의 경우에는 오랜 세월에 거쳐 이룩했을 투쟁의 역사와 그에 따르는 고통을 우리는 겪지 못했고 그 부채를 현대에 이르러 치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구심점을 잃고 표류하기 바쁜 와중에 군사독재와 민주화의 진통을 겪으며 국민들의 공감대가 형성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고 소시민들은 생존하기 위해 각자도생해야 했다. 이념보다는 현실의 벽을 마주해야했던 국민들 입장에서 자연스레 배금주의적 의식이 싹트기 시작했을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보인다. 그런 이야기가 있지 않던가.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거만한 게 없더라' 고.

 

[설거지론이 대두되는 배경 : 소통의 장과 개인의 소통 능력 및 의지 빈곤화]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사람들간의 정보 교환과 소통의 가능성은 넓어진 반면 진실된 소통의 장소와 기회는 도리어 줄어들고있다. 각자도생해야하는 사회적 상황이 개인의 소통 필요성을 저하시켰고 타협보다는 경쟁을 통한 투쟁과 승리를 통한 배제의 기술만을 학습시켰다. 각박한 환경속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이들은 커뮤니티 속 익명의 그늘 아래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 심리적 지지를 던지고 이는 자연스레 개인간의 대등한 입장에서의 소통이라는 개념을 약화시켰으며 상대를 인격체로서 대할 기본적인 도덕 관념조차 흐리게 만들었다. 이렇게 되니 유물론적 관점으로만 편향적으로 사물을 판단하고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며 별 문제없이 결혼 생활을 영위하고있는 사람을 함부로 비웃고 있는 것이다.

더욱 큰 문제는 이런 풍조가 사람간의 소통 능력을 약화시키고 더 나아가 소통의 의욕마저 제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인간 관계를 수직적으로 여기는 이들에게 소통이란 존재할 수 없다. 그저 기계적인 상명하복식 의사전달만이 있을 뿐이다. 개선을 위한 토대마저 약화시킬 수 있는 지금의 풍조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설거지론과 반대진영에 대한 양비론의 근거]

물론 남성들이 결혼 당시 배우자에게 원했을 진실된 사랑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그 충격적인 반전에 상실감과 배신감이 클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 아니다. 허나 그로 인해 귀결되는 설거지론은 정당하지 않다. 그 설거지론에 정론이 아닌, 래디컬 페미니즘의 사상에 입각해 반발하는 입장 역시 정당화될 수 없다. 래디컬 페미니즘이 비판받는것 처럼 설거지론 역시 비판받을 사항들이 존재한다.

첫번째로, 개인이 겪은 한정적인 경험으로 모든 여성을 설거지론으로써 설명하려고 드는 자세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의 전형적인 예이다.

둘째, 설거지론은 배우자간 서로 존중하며 결혼생활을 영위하고있는 화목한 가정의 사례가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셋째, 아내의 처녀성을 강조하는 것은 쟁점의 본질과는 거리가 있다. 결혼 생활간 남편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없음만을 문제 삼는 것이 차라리 현실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 생활의 불행함의 원인을 찾는데 아내의 결혼 전 행적을 들춰내 폄하하는 것은 그저 인신공격을 통해 상대방의 발언권을 박탈하기 위한 목적일 뿐 아닌가?

넷째, 결혼 생활간 자신에 대한 애정 문제에 국한한다 하더라도 결혼 생활의 불행함의 원인을 그저 밖에서만 찾으려고 하는 심리에서 귀결된 결론은 아닌가?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아내의 모습에서 과연 자신으로부터 기인한 원인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는가?

설거지론에 대한 비판은 이 정도 근거로 정리가 될 것이다. 반면 이에 반발하는 래디컬 페미니즘 기반의 의견 또한 그 당위성에서 지탄받을수밖에 없는 부분이 많다.

첫째, 설거지도 남자가 능력이 있어야 당하는 거라고 반박하는 주장은 문제의 본질과는 상관이 없다. 남자의 능력 유무에 무관하게 본인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해 마땅히 짊어져야 했을 희생이 뒷전이 되어야 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거기다 저 논리대로라면 도리어 설거지론이 타당하다고 본인이 인정하는 셈이다.

둘째, 설거지론을 주장하는 남자를 능력을 갖추지 못해 결혼 경쟁에서 도태된 패배자로 매도하는 주장은 인신공격의 오류의 전형적인 사례다.

셋째, 도리어 설거지론을 인정하며 남편의 경제적 능력에 편승해 책임 없는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 문제되냐고 반박하는 사람은 결혼 생활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설거지론에 불을 지핀 주범이라 할 것이다.

 

[결언]

'에스테 빌라' 라는 독일 작가가 쓴 책, 『Der Dressierte Mann』 (The Manipulated Man : 조종당하는 남자) 은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오히려 영악하게 남성을 이용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내용의 책으로 1971년에 발행된 것을 시작으로 큰 센세이션을 일으켜 국내에는 2007년에 『길들이는 여자들, 길들여진 남자들』 이라 번역되어 설거지론의 주장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경전 수준으로 취급되고 있었다.

비록 책의 전문을 읽지 않아 이 책에서의 주장에 대한 견해를 밝히기에는 제한되나 기본적으로 작가가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내용은 '현실이 이러이러하니 남성들은 절대로 여성과 결혼해주지 마라' 가 아니라 '남성들은 그대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고 있으니 착취할 생각만 하지 말고 남편을 존중해라' 가 아니었을지 싶다. 만약 이 책이 그만큼 사회 질서에 반하는 내용이었다면 사회적으로 호응을 불러있으켰을까?

모두 자아성찰적인 자세를 뒤로 하고 문제의 원인을 밖에서 찾으며 남 탓만을 하고 있기에 발생하는 비극이다.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 상대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를 비롯한 공동체는 지속 가능한 미래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런 날이 오지 않는다면야, 이 사회의 미래는 불을 보듯 뻔하지 않겠는가.

 

 

평생 감사해하고 사랑만 하고 살아도 인생이 짧습니다.
그만 좀 싸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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